《커다란 순무》는 《곰 사냥을 떠나자》로 우리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헬린 옥슨버리의 초기작으로, 영국의 거장 일러스트레이터로 우뚝 서 있는 존 버닝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옥슨버리의 그림책은 일러스트레이터 경력을 시작한 첫 10년 동안은 먼저 그림책계에 입문한 남편 존 버닝햄과 비슷한 작풍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촌로의 생김새며,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해 써서 질감을 살린 그림이며, 반복 어구를 쓴 짧은 문장이며,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도록 배경을 최소한으로 없애고 여백으로 처리한 것하며 영락없이 존의 “검피 아저씨”이다. 이 이야기는 본디 알릭셰이 톨스토이가 썼지만, 취학전 어린이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끔 군살은 모두 없애고 플롯만 깔끔하게 남겨 두었다. 이제 갓 글자 깨친 어린이에게 길고 그림도 없는 옛이야기를 안겨 주기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책 크기도 자그마하고 글자도 커다래서 어린이 혼자서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 어린이로 하여금 잡아당기고 붙들고 물고, 잡아당기고 붙들고 물면서 자연의 신비한 힘을 체험케 하는 놀라운 책. 원문에는 없던 것인데, 이 한국어판에서는 숫자 세기도 함께 익힐 수 있도록 번역하여 일종의 카운팅북(서양에서 어린이들에게 숫자를 익힐 목적으로 펴내는 그림책)으로 만들었음을 알려 둔다.

단단하고 달콤하게 자라랬더니, 커다랗고 높다랗게 자라서 사람들 애를 먹인 괘씸한 순무. 이 러시아 옛이야기에는, 자연에 정복당하고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의 소박한 소원이 담겨 있다. 굴뚝에서 연기가 폴폴 피어 오르고 있는 그럴 수 없이 평화로운 시골 마을. 한 촌로가 순무 씨 한 알, 더도 말고 꼭 한 알을 땅에 심고 “순무야, 순무야, 조그만 순무야, 단단하고 달콤하게 자라렴!” 하고 아기 어르듯이 조심스럽게 어른다. 요즈음에야 먹을 것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주로 말과 소의 먹이로 쓸 셈으로나, 아니면 음식 치장이 필요한 샐러드 같은 요리에나 곁들이려고 이 순무를 기르지만, 옛 러시아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길렀을 성싶다. 자연의 변덕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렸던 시절에 우리나라 농부들이 쌀 한 톨 귀히 여기듯이, 러시아 농부도 그렇게 순무 씨 한 알을 귀히 여긴다. 그런데 이 순무가 그만, 온 집안 식구며 가축들이 다 한데 힘을 모아야만 뽑을 수 있을 만큼이나 커다래져 버린다. 거실에서 새 모이를 주고 있던 할머니도, 나무에 올라타 동화책을 읽고 있던 손녀도, 소파에서 단잠 자던 검둥이도, 꽃밭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도, 하물며 쥐구멍에 있던 쥐까지도 차례로 불려 나와 영차, 영차 힘을 써서 겨우 순무를 뽑아낸다. 할머니, 손녀는 그렇다 치고, 개와 고양이, 고양이와 쥐는 얼마나 앙숙이던가? 옛 러시아 사람들에게 자연의 위력은 그렇게, 앙숙에게 손을 내밀고 똘똘 뭉쳐야 할 만큼 대단했다. 어쨌거나 이들이 노동한 대가로 기다리고 있는 건 단단하고 달콤하고 커다랗고 높다란 순무 잔치! 땀흘린 이들을 하나도 따돌리지 않고 모두 공평하게 음식을 나누어 먹는 마지막 페이지의 둥그런 잔치상은 절대로 예사롭게 볼 장면이 아니다. 이것이 무슨 교훈인가를 꼭 한 가지씩은 가르쳐 주는 옛이야기라는 걸 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