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크의 그림에는 폭발할 듯이 즉각적으로 터지는 폭소가 아니라, 볼수록,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사람을 웃기는 유머가 있다. 이것을 만화책이라고 해야 할지, 그림책이라고 해야 할지. 인물의 성격이며 분위기를 단필로 포착한 편안한 그림새로는 훌렁훌렁 읽히는 만화 같은데, 주제를 다루는 품이며 독자로 하여금 은근히 머리를 쓰게 하는 솜씨로는 아무래도 그림책이라는 쪽에 한 표를 줘야 할 것 같다. 물론 블레이크는 만화를 말할 수 없이 사랑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만화를 그리다 보니 얼결에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사람이지만. 그리고 자신이 그린 만화 주인공들이 모두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제멋에 사는 만화가였다지만.

표지서부터 벌써 장난기가 발동해 있다. 머리에 손을 대고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는 뒤퐁 교수의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앵무새는 모두 아홉 마리. 남은 한 마리는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다. 예사로운 어린이는 아마 표지서부터 이상한 기미를 못 느끼고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특한 어린이는 바로 밑에 있는 “앵무새 열 마리”라는 제목 때문에 대뜸 표지서부터 앵무새의 수효를 세어 보려고 손가락을 들이댄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 책을 읽으려면 뒤퐁 교수와 함께 온 집 안을 구석구석 쑤시고 다니면서 앵무새들을 찾고 세고, 또 찾고 세느라고 맥박을 180으로 높이고, 뇌세포의 동작 속도를 마하 180으로 질주시킬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니까(집에 있는 물건 주줄이 늘어 놓고 “이거 몇 개야?” 하고 아이들을 닦아세울 필요도 없다, 이걸 다 읽으려면 저 알아서 부지런히 세고 또 세야 하니까).

뒤퐁 교수는 언제나 아침 여덟시면(어린이들이 눈비비고 일어나는 시간) 벌떡 일어나서 세수하고 이 닦고 옷 단정히 입고(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뭘 해야 할지 말로 가르칠 필요 없다) 애완 앵무새들한테 가서 두 팔을 쫙 벌리고 “안녕, 내 멋진 깃털 친구들!” 하고 문안 인사를 드린다. 교수가 앵무새들한테 바치는 사랑은 너무나 지극하여 하루도 인사를 거를 수 없다. 그것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똑같은 인사말을 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교수의 한결같은 아침 인사말이 지겨워서 미칠 지경이 되어 버린다. 흔히 알려지기로 앵무새가 얼마나 영악한 동물이던가? 이튿날 교수가 앵무새들이 있는 온실로 들어와서 팔을 쫙 벌리고 예의 그 인사말을 할 포즈를 취했는데, 녀석들이 몽땅 사라지고 없다.
다음 페이지서부터 어린 독자의 눈과 손가락과 머리가 사뭇 분주해진다. “어, 여기, 여기 숨어 있잖아!” 그러나 뒤퐁 교수는 안경까지 쓰고도 도무지 앵무새를 찾아내지 못한다. 어린 독자들은 금세 그 속내를 아는데, 뒤퐁 교수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어찌 보면 뒤퐁 교수는 아이들의 장난을 모른 척 눈감으면서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는 능청스러운 어른의 대역처럼도 보인다. 앵무새들이 해 지도록 숨바꼭질 장난을 끝내지 않아, 교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룻밤새에 교수의 몰골은 영 말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깔끔하던 교수가 봉두난발하고 구깃구깃한 차림으로 온실 문을 쫙 여는데, 얄미운 녀석들이 한 마리도 빠짐 없이 “우리가 언제 교수님을 놀렸던 적이 있었던가요?” 하는 얼굴로 능청스럽게 앉아 있다. 블레이크는 여기서 한수 더 나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니. 누가 그 어떤 사람에 해당할까?

숫자 세기를 못 배운 어린이에게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 유머 지수가 떨어지는 어른에게는 낙서투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