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이 만든 명작 《하이디》
500쪽에 이르는 이 긴 책의 줄거리가 어느 한 부분 낯설지 않은 것은 100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온 인기 덕분이다. 《하이디》는 1937년부터 여러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일본인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애니메이션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하이디》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작품의 배경이 된 스위스 마이엔펠트에 꾸며진 ‘하이디 마을’에는 전세계의 관광객이 줄을 잇고, 스위스의 동전에는 작가의 얼굴이 새겨져 있을 정도이니, 그 인기를 가늠할 만하다.

이 작품이 이토록 인기를 누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작품 자체가 갖는 흡입력이 한몫을 할 것이다. 사실 하이디가 알프스와 대도시를 오가며 사랑을 실어 나른다는 줄거리는 단순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 많이 있다. 우선 하이디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집을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한 향수병이 아니다. 작품이 쓰인 19세기 후반은 산업혁명의 영향이 유럽 전반에 퍼지던 때이다. 스위스라고 그 영향을 피할 수가 없어서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도시로 빠져나갔는데, 그렇게 도시에 간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에 허덕이거나 하인으로 일해야 했다. 성장하는 도시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 폐해를 몸으로 느끼면서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하이디》가 아름다운 자연과 건물이 빽빽한 도시를 강하게 대비시키는 것도 바로 그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도시를 견디지 못하는 아픔은 하이디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작가 자신이 결혼 후 도시 생활을 하면서 겪은 우울증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예찬하는 데만 그쳤다면 《하이디》의 가치가 지금껏 지켜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단순할 수 있었던 줄거리에 풍성하게 덧대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은 흥미진진하며, 주인공인 하이디부터 잠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자랑한다. 작가는 인물들을 일방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적절한 사건과 대화로 풀어내 독자들이 그 인물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입체감을 준다. 사실 겉으로 밝고 명랑하게만 보이는 하이디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큰 슬픔을 안고 있다. 아주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의지하던 자연과 할아버지를 떠나 갑갑한 도시에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슬픔을 안고 울음을 삼키는 것은 여덟 살 어린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었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하이디는 마음의 문을 닫은 할아버지를 변화시키고, 딸을 잃은 의사 선생님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 《하이디》의 행복한 결말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 하이디와 토미 웅게러의 행복한 만남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토미 웅게러의 그림이다. 뱀이나 강도 등 그림책에서 금기시 되었던 소재를 과감하게 끌어 와서 그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 왔던 대범한 작가 토미 웅게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세계 최고의 그림책 작가로 인정 받고 있다. 그는 아득한 자연 속의 이상적인 소녀를 그린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모두 튼튼하고 호기심이 많은 건강한 소녀로 하이디를 그려 냈다. 염소들이 뛰노는 모습, 아름다운 경관,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보일 듯 말 듯한 웃음까지 그려낸 토미 웅게러 덕분에 하이디는 한층 생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