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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통해 탐색한 중세의 삶과 죽음, 예술

중세 시대의 몸

  • 판매가 32,000원
  • 책정보 페이퍼백 456쪽 148*225mm 2023년 09월 22일
  • ISBN_13 979-11-7125-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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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세의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중세는 다방면에서 현대의 각종 제도와 체계가 마련된 시기로 중세의 의학은 과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계몽주의 사상가들로부터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중세관(中世觀)은 지극히 왜곡된 경우가 많았다. 10년 이상 연구에 몰두해 온 저자 잭 하트넬은 진실한 중세의 면면을 나누려는 열의로 이 책을 집필했다.
중세인들은 인간의 몸을 신비하고 특별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문학, 예술, 건축 등에 적극 활용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세 사람들이 인간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봤는지를 여러 사례와 도판 같은 다양한 근거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한다. 신화 같은 이야기도 있는가 하면 논문이나 연구 결과 같은 전문적인 자료도 있다. 인간의 몸을 주제로 하지만 의학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정치, 철학, 종교, 역사를 한데 어우르며 중세의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제공한다.
 

저자소개

지은이: 잭 하트넬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에서 미술사 강사로 재직하며 중세 및 근대 초기 유럽과 중동의 시각 문화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컬럼비아 대학교와 코톨드 미술 대학, 막스플랑크 과학사 연구소,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등에서 근무했다.
 


 

목차

중세 시대의 몸
머리
감각 기관
피부
심장
생식기
미래의 몸
 
감사의 말
참고 문헌
도판 목록
찾아보기
 
 

책속으로

처음 시작된 때가 언제였든 간에, 이 같은 중세관은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이 왜곡되었다. 이처럼 일그러진 인상 속에서 중세의 실제 모습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내가 10년이 넘도록 해 온 작업의 일부이자,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우리는 단순히 스스로의 비위를 맞추고 싶다는 이유로 시간상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세 세계의 어느 일면이나마 진정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는 당대의 기준에 따라 그 시대를 대해야 한다. 이미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앞서 등장한 프랑스 출신 반쪽 남자가 영원히 정지된 모습으로 굳어 버리기 전까지 삶을 파악했던 방식대로 중세의 삶을 보려고 애써야 하며, 이를 위해 실제로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한 명씩 차례로 집중해 살펴볼 것이다.
—첫 장 ‘중세 시대의 몸(Medieval Bodies)’에서
 
프랑스 왕 샤를 6세(1368-1422)의 경우는 현존하는 중세 시대의 정신 질환 기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에 속하는데, 그가 오랫동안 앓은 정서 불안정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에 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유독 생생하게 전해지는 사건 하나는 1392년 8월, 왕이 수행단을 거느리고 르망 근교의 울창한 숲에 말을 타러 나갔을 때 일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걸인이 왕의 말 앞에 엎드려 적선을 간청했고, 다른 설에 따르면 그저 시종이 땅바닥에 창을 떨어뜨려 철커덕 소리가 커다랗게 났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었든 간에, 샤를 6세는 그 충격 때문에 반쯤 정신이 나갈 만큼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던 모양이다. 왕은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절친한 친구와 친족과 하인에게 칼을 휘둘렀고, 무려 다섯 명을 죽이고 나서야 주변 사람들에게 제지당했으며, 이후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사흘 만에 겨우 의식을 되찾은 왕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통곡했다. 이후 10년 동안 왕은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당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했고, 탈진할 때까지 달리기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며, 왕궁 곳곳의 가구를 넘어뜨리고 자신의 문장(紋章)은 보이는 족족 부수려고 했다. 한번은 심지어 자기 몸이 연약한 유리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산산조각 날까 두려워 꼼짝 않고 서서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 또한 인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둘째 장 ‘머리(Head)’에서
 
그러나 이 태피스트리 연작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젊은 여성은 태피스트리 다섯 장에 걸쳐 사자와 일각수에게 소형 오르간인 하모늄의 연주를 들려주고, 앵무새와 원숭이에게 대접에 든 조그마한 나무 열매를 먹이고, 들꽃의 향기를 맡고, 일각수의 뿔을 쓰다듬고, 일각수와 함께 거울을 갖고 논다. 이러한 이미지로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시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찍이 고전 시대와 중세 초기의 저술가들은 감각의 구성 요소를 매우 융통성 있게 파악했는데 여기에는 기억이나 상상 같은 뇌의 능력, 또는 분노와 신의 사랑 같은 격한 감정 따위가 함께 포함되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 후기에 이르면 전통적인 ‘오감(五感)’이 몸과 주위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감각적 상호 작용의 다섯 가지 기본 형태로 고착된다. 이들 감각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당대 사상가들은 각각의 감각이 토대로 삼는 기본 물질과 그 물질이 세상 속에서 돌아다니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꽃에서 나는 향기가 바람에 실려 퍼지는 까닭이 무엇인지, 소리가 허공을 지나 전해지는 까닭은 또 무엇인지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감각의 본질을 밝히려면 먼저 앞서 말한 감각 신호를 몸 자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부터 아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셋째 장 ‘감각 기관(Senses)’에서
 
피부는 꼭 몸에 붙어 있지 않더라도 붙어 있을 때와 똑같이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는 일이 가능했다. 책을 집필하는 일에 관한 한 십자군 원정사의 연대기이든 외과 수술에 관한 전문 서적이든 아니면 그 밖의 어떤 주제를 다룬 책이든 간에, 중세의 저술가가 택할 수 있는 책의 재료는 다양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권역에서 활동한 작가들은 대개 종이를 선택했는데 이는 그들이 일찍이 8세기부터 접촉하기 시작한 중국 문화에서 빌려온 기술이었다. 그러나 서부 및 중부 유럽에서 종이보다 훨씬 더 흔하게 지식과 이미지를 전달했던 매체는 양피지, 즉 건조 및 가공 작업을 거쳐 살아 숨 쉬는 피부에서 평평하고 매끈매끈한 책 속의 낱장으로 변신한 동물 가죽이었다.
—넷째 장 ‘피부(Skin)’에서
 
죽음과 해골을 익살스럽게 결합한 중세의 물건 중에는 이러한 벽화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것도 있었다. 14세기 피렌체의 조각가 발다사레 델리 엠브리아키(Baldassare degli Embriachi)는 갖가지 사치품의 외관을 실제 동물 뼈로 장식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기법은 물건 표면에 나무나 짐승 뿔, 하마 엄니, 소뼈, 말뼈 등을 서로 대비되는 모양으로 조그맣게 상감 세공하되, 이것들을 결합해 정교한 무늬의 장식판이나 조그마한 인물상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를 만드는 것이었다. 엠브리아키는 1390년대에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공방을 옮겼는데 여기서 만든 작품 수백 점이 지금도 남아 있다. 조그만 십자가, 직사각형 상자, 원통형 장식함, 인물상이 가득 들어찬 세 단짜리 제단 모형, 체스와 주사위 놀이용 이중 놀이판, 첨탑이 달린 커다란 제단 장식까지, 모두가 뼈를 사용한 같은 기법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러나 엠브리아키 공방은 나중에 훨씬 더 사치스러운 소재인 상아로 조그만 물건을 만들어 인기를 끄는 쪽으로 변해 갔다.
—다섯째 장 ‘뼈(Bone)’에서
 
이처럼 양식화된 한편으로 추상적인 형상이 어쩌다가 오늘날과 같이 실제 신체 기관과 정서를 상징하게 됐는지는,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대에 최음제로 여겨졌던 덩굴 담쟁이나 다른 식물의 이파리 모양과 연관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장식용 ♥ 문양은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는데, 그 생김새 때문에 나중에 한쪽 끄트머리가 반대쪽보다 더 뾰족하고 심방과 심실이라는 이원적 구조를 띤 장기를 가리키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는 어쩌면 꽤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이 상징은 중세 시대가 다 끝날 즈음이 되어서야, 그것도 유럽에서 만들어진 초기 인쇄물의 이미지에 등장하면서야 비로소 구체성을 띠고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미지를 만들어 여러 지역의 다양한 독자층에 퍼뜨리는 일은 인쇄술
이라는 새 기술이 등장한 1450년대 이후로 줄곧 훨씬 더 쉬워지고 빨라졌다.
—여섯째 장 ‘심장(Heart)’에서
 
노리치에서 벌어진 사건으로부터 거의 400년이 흐른 후에 제작된 이러한 이미지는 유럽에서 이런 식의 아동 살해 의식을 규탄하는 분위기가 얼마나 만연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더 나아가 피에 집중된 관심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도 함께 드러난다. 예로 든 판본의 삽화를 보면, 어린 시몬의 상처와 아이의 발치에서 피가 점점 차오르는 그릇을 각별히 신경 써서 선홍색 물감으로 칠해 놓았다. 이 그림과 함께 실린 글에는 사건에 관련된 유대인 여덟 명이 고문당한 끝에 털어놓은 증언이 마치 쌤통이라는 듯이 포함되어 있다. 설명에 따르면 이 유대인들은 나중에 크리스트교도의 희생이 필요한 의식, 특히 유월절에 먹는 누룩 없는 빵인 무교병을 만들 때 시몬의 피를 사용할 작정이었다. 또한 오래된 유대 민족 예언에 이르길, 크리스트교도 소년들의 피가 흐를 만큼 흐르면 유대 민족이 성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리라고 했다는 식의 한층 더 심각한 음모론도 함께 유포됐다. 이 문제에서 중세의 피가 지닌 생명력은 유럽 각지에서 점점 커진 공포에 의해 극단적으로 변형됐다. 즉, 몸속을 순환하는 생명의 질료에서 전 대륙을 불태우는 인종적 증오와 분열의 연료로 왜곡된 것이다.
—일곱째 장 ‘피(Blood)’에서
 
이처럼 중세의 손에는 미세하면서도 복잡한 기호들로 이루어진 점술 체계가 화려한 꽃을 피웠다. 손가락 뿌리 근처에 생긴 십자가 모양은 예기치 못한 파멸을 부르는 저주의 상징이었다. 중간에 선을 그은 문자 ‘C’처럼 생긴 모양은 주교의 지위에 오르리라는 예언이었던 반면, 원 두 개가 중복된 ‘oo’ 모양은 손 주인이나 주인의 남동생이 머잖아 고환을 잃으리라는 예언이었다. 물론 이런 식의 근거 없는 점술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당대의 일부 자료는 수상술을 단순히 실없는 소일거리이자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는 요술로 묘사한다. 그러나 수상술에서 중요하게 보는 지점 가운데 참모의 도덕성이나 아내가 될 사람의 정절과 순결을 가늠하는 지점이 포함된 것을 보면, 진지한 해석이 필요한 경우에는 손금도 어느 정도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으리라 추정된다. 중세 사람들은 더 자세히 볼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들의 양팔 끄트머리에 책을 읽고 노래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달려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인생 전체의 지도마저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여덟째 장 ‘손(Hands)’에서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재미의 대상이기도 했던 항문이 치료자들에게는 짭짤한 돈벌이의 경연장이기도 했다. 14세기 잉글랜드의 외과의였던 존 아던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는데, 그는 1340년대에 윌트셔 및 노팅엄셔 지역에서 출세한 개업의로 활동하며 명성을 드높였다. 아던은 치료에 성공한 사례가 많았을 뿐더러 본인 이름으로 쓴 인기 있는 외과 논문 여러 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등, 당대 잉글랜드의 여러 의사들 가운데 단연코 돋보이는 인물이다. 질병과 약학의 전체적인 개요에 관심이 많았던 동시대 의료인들과 달리, 아던은 단 한 종류의 혁신적인 외과 수술법을 책으로 펴냄으로써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 처치법은 다름 아닌 항문 샛길(치루) 치료법이었다.
—아홉째 장 ‘배(Stomach)’에서
 
성기의 한 가지 특징 앞에서는 모든 사람, 즉 남성도 여성도, 유대인도 크리스트교도도, 동성애자도 양성애자도 예외가 아니다. 결국에는 누구나 오줌을 누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4대 체액설에 기반한 의학에서 지식이 풍부한 치료자는 땀과 토사물, 침, 배설물 등 몸에서 방출되는 모든 물질의 양과 질을 면밀히 관찰해 몸속에 도사린 불균형의 징후를 찾아내는 일이 가능했는데, 이때 오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내과의를 위한 소변 검사 지침은 7세기의 문헌에 일찌감치 등장한다. 오늘날 오줌의 색은 몸속의 수분 함량을 나타낼 뿐 아니라 이런저런 건강 정보도 함께 알려 주는 지표이지만, 중세 의학에서는 오줌을 점치기의 재료로 극단까지 활용했다.
—열째 장 ‘생식기(Genitals)’에서
 
로마가 지배한 고대 세계에서는 연속적으로 펼쳐진 넓은 육지를 동일한 제국이 지배함으로써 생기는 안정성과 견고한 사회 간접 자본이 하나로 결합했다. 그 덕분에 지중해 연안 지대에는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기에 안전한 도로망이 탄탄하게 건설되었다. 그랬던 제국이 붕괴하면서 그때까지보다 더 단절되고 소박한 생활 방식이 되살아났고, 그 결과 간선 도로를 정비하는 일과 그 길에서 법질서를 유지하는 일 모두 자연스레 여기저기 회색 지대가 생겨났다. 중세 시대 여행자의 기록을 보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노면의 홈 때문에 수레바퀴나 차축이 망가지기 쉽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또 말을 타거나 도보로 여행하다 보면 노상강도를 당할 위험이 있다고 탄식하는 내용도 있다. 각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와 귀족이 받은 편지에는 칼을 든 강도에게 협박당해 소지품을 빼앗겼다는 신고문이 분노 어린 필치로 적혀 있었고, 간선도로 노변의 나무와 덤불은 도적 떼가 매복하기 좋은 은신처로 사용하지 못하게끔 도로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가치치기를 하도록 현지 법으로 규정한 경우도 있었다.
—열한째 장 ‘발(Feet)’에서
 
중세의 몸에 관해 이야기할 거리가 떨어질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몸과 마찬가지로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온갖 관찰 방식이 우리 눈앞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거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라본 이런저런 방식들을 그저 겉핥기식으로 살펴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체는 고대의 복잡한 이론을 논의하고 발전시킨 공간이자, 감각을 이용해 주위 세계와 접촉하는 매개체였고, 성과 종교와 인종이라는 상이한 정체성들이 불협화음을 빚는 무대였으며, 추악함과 고통부터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까지 여러 미학적 관념을 표현하는 화폭이기도 했다. 몸은 곧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의미했다.
—열두째 장 ‘미래의 몸(Future Bodie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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